Tempo Rubato


2021.10.20 - 11.19   

Project 1. 전시후원작가

김령문

Ryeung Moon KIM



우리는 수많은 움직임 속에 둘러싸여 있고 그것들은 끊임없이 새롭게 만들어지며 살아있는 리듬을 가지고 호흡하고 순환한다. 자연과 일상 그리고 내면에서 만들어지는 여러 가지 모습들, 무언가를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순간에도 끊임없이 생성되는 미묘하고 다양한 모습들을 통해서 여러 가지 것들을 추상해내게 된다. 나는 이러한 움직임과 리듬에 존재하는 무수한 뉘앙스에 관심을 갖고 그것들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작가노트 중에서]

 


창작을 경험해 보지 못한 예술작품의 관람자에게 추상의 과정은 미지의 영역이다. 작가 내면에 잠재된 고유의 감성과 감각이 때로는 무의식의 영역을 넘나들며 순수하게 선과 형태, 색채로 드러나는 과정은 도대체 무엇인가. 몇 번의 호흡과 즉흥적인 제스처로 순식간에 완성되었을 법한 드로잉부터, 도식화된 기하학적 패턴으로 구성된 화면, 무의식적이고 반복적인 붓질이 가득한 역동적인 회화에 이르기까지 추상 회화를 각자 다르게 상상하고 매력적으로 감각하는 그 지점 또한 궁금하다. 이번 전시는 그 모호한 과정과 지점에 조금 더 다가가 본다.

 

김령문 작가에게 추상을 향한 기본 태도는 기다림이다. 모든 감각을 열어 놓고 일상과 주변 환경으로부터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 창작의 가장 중요한 첫 단계이다. 심상을 떠올리기 위해 섬세한 자극으로부터 추상의 단서를 느낄 수 있도록 그는 이곳저곳을 배회한다. 심상이 표현으로 이어지는 순간까지 머릿속은 상상하고 지우고 다시 떠올리기를 수없이 반복하며, 손은 드로잉을 거듭하며 원했던 그 감응의 순간을 찾아 나선다. 일련의 드로잉이 형상을 갖추며 미묘한 변주가 시작된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무엇보다 감각의 예리함을 유지하기 위해 집중한다. 동시에 반복된 행위를 거치며 감각이 무뎌지는 순간을 의식하고 경계하는 습성도 함께 작용한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은 즉흥곡을 연주한다. 2주의 전시준비기간 동안 추상의 충동을 한껏 끌어올리고 응축시켜 전시장 현장에서 풀어냈다. 이 곡에는 작가만의 감성을 추상으로 풀어내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담겨 있으며, 다양한 변주로 기교를 맘껏 펼치는 연주를 보여주고자 했다. ‘박자를 훔치다’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템포 루바토(Tempo Rubato)’는 연주자가 자신의 재량에 따라 곡을 빠르게 또는 느리게 연주하고 원래 박자로 돌아가라는 의미를 지닌 음악 용어이다. 본인만의 리듬을 느끼며 박자를 넘나드는 완급의 조절은 연주자의 감각과 역량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잡아당기고 늦추며 원하는 균형을 맞출 수 있는 즉흥적 연주는 가장 아름답고 조화로운 순간의 소리일 것이다.

 

작가는 이번 연주를 위해 익숙함으로부터의 변화를 과감하게 시도했다. 다양한 물성을 지닌 조형적 재료들(나무 합판, 석고, 칠판, 비닐, 종이 등) 위에 각종 도구를 이용해 긋고 칠하고 파고 덧붙였다. 어색한 왼손 드로잉은 오른손과는 다른 방향의 선 맛을, 반복적인 터치는 율동적 리듬을 선사한다. 굵고 거친 숨결의 붓질, 쉬어가듯 더딘 선, 멈춘 점, 지워져 사라진 흔적들, 이 모든 것들은 낯선 재료의 물성과 만나 의도치 않은 뉘앙스를 만들어 냈다. 커다란 가벽 뒷면에 배치된 다수의 드로잉은 이번 즉흥연주를 위해 준비했던 연작으로, 작업에 반영된 요소와의 연관성을 유추하며 추상의 과정을 엿볼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작가로서 마흔의 나이는 생각이 복잡해지는 시기이다. 한때는 의욕 넘치는 빠른 속도와 강렬함에 숨이 찼고, 때로는 너무 느린 속도에 조급하고 침울했던 과거가 보이기 시작한다. 지금은 앞으로의 십 년을 바라보며 새로운 방향 설정과 변화의 욕구를 느끼고, 그 적절한 타이밍을 놓칠까봐 초조하다. 삶의 템포는 사람마다 다르다. 현재 내가 머물러 있는 지점은 어디이며, 전체적인 박자를 놓치지 않으려는 의지와 노력이 앞으로의 작업의 방향을 제시하고 또 다른 창작의 가능성을 열어 주리라 기대한다. 최근 추상회화의 열풍이 거센 한국의 현대미술 현장 속에서, 여전히 자연과 감각에 감응하는 순수하고 섬세한 추상의 울림을 전하는 김령문 작가의 작업을 소개하며, ‘추상’ 작업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 또한 유행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 감각이 필요한 시점은 아닐는지 생각해 본다.


황신원|사루비아 큐레이터





e-card